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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아르멘다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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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드로 아르멘다리스는 멕시코 배우로, 에밀리오 페르난데스 감독의 영화에 자주 출연하며 멕시코 영화 황금기를 이끌었다. 그는 멕시코와 할리우드를 오가며 활동했고, 존 포드 감독의 영화와 007 시리즈의 《007 위기일발》에 출연했다. 말년에는 암 투병 중 자살했으며, 《007 위기일발》이 유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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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아르멘다리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영화
영화 "3 Godfathers" (1948) 속 페드로 아르멘다리스
본명페드로 그레고리오 아르멘다리스 하스팅스
출생일1912년 5월 9일
출생지멕시코시티, 멕시코
사망일1963년 6월 18일
사망지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미국
매장지판테온 하르딘, 멕시코시티, 멕시코
국적미국
배우자카르멜리타 보르 (1938년 결혼)
자녀2명 (페드로 아르멘다리스 주니어 포함)
친척글로리아 마린 (사촌)
직업 및 활동
직업배우
활동 기간1935년–1963년
주요 작품『운명의 여인』
도망자
『아파치 요새』
『세 명의 대부』
『작은 무법자』
『007 러시아에서 사랑을 담아』

2. 생애

멕시코의 배우 페드로 아르멘다리스는 멕시코시티 출신으로,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다.[9] 그는 에밀리오 페르난데스 감독의 작품에 자주 출연했으며, 특히 돌로레스 델 리오와 함께 《야생의 꽃》, 《마리아 칸델라리아》 등에서 호흡을 맞추며 멕시코 영화 황금기를 이끌었다.[9] 멕시코 영화 연구자 가나야 시게로는 아르멘다리스가 "멕시코의 정경을 대표하는 남성을 체현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9]

그가 주연한 페르난데스 감독의 《진주》는 일본에 처음 소개된 멕시코 영화로 알려져 있다.[9] 또한 존 포드 감독의 《아파치 요새》, 《세 명의 대부》 등 할리우드 서부극에도 출연하며 국제적인 활동을 펼쳤다.[9] 그의 마지막 작품은 테렌스 영 감독의 《007 위로부터의 사랑》(1963년)으로, 이 영화에서 터키인 정보부 이스탄불 지국장 알리 케림 베이 역을 연기했다.[9]

큰 인기를 누렸으나, 말기 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던 중 1963년 51세의 나이로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007 위로부터의 사랑》은 그의 유작이 되었다.[9]

2. 1. 초기 생애

아르멘다리스는 멕시코시티에서 멕시코인 아버지 페드로 아르멘다리스 가르시아 콘데와 미국인 어머니 아델라 헤이스팅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배우 글로리아 마린의 사촌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남동생 프란시스코와 함께 텍사스주 라레도에서 삼촌 헨리 헤이스팅스 시니어와 살았다.

이후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1928년 9월부터 1932년 5월까지 캘리포니아 폴리테크닉 주립 대학교에서 기계 공학을 공부했다. 1931년 5월 학교의 학술 과정을 졸업했으며, 주니어 칼리지 과정에서 1년을 더 다닌 뒤 1932년 학년 말에 멕시코로 돌아갔다. 대학 재학 중에는 학생 신문과 연감 편집, 여러 학생 연극 제작에 참여하는 등 학생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2. 2. 멕시코 영화 황금기 (1935-1946)

학업을 마친 후 멕시코로 이주하여 철도 회사, 관광 가이드, 이중 언어 잡지 《멕시코 레알》의 저널리스트로 일했다. 그가 미국인 관광객에게 《햄릿》의 독백을 낭송하는 것을 본 영화 감독 미겔 사카리아스에 의해 발탁되었다. 이후 에밀리오 페르난데스 감독과의 만남은 그의 배우 경력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두 사람은 수많은 영화에서 협력했다. 《나는 순수한 멕시코인》(1942), 《플로르 실베스트레》(1942), 그리고 특히 《마리아 칸델라리아》(1943)는 그들의 초기 공동 작품이었다.

에밀리오 페르난데스의 지도 아래, 아르멘다리스는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닌 영화적 개성을 발전시켰다. 그는 주로 강인하고 남성적인 인물, 원주민, 농부, 혁명가 역할을 맡았으며, 여러 차례 판초 비야를 연기하기도 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인 돌로레스 델 리오와 마리아 펠릭스와 호흡을 맞췄다.

아르멘다리스는 특히 돌로레스 델 리오와 함께 멕시코 영화계의 전설적인 커플 중 하나를 이루었다. 《마리아 칸델라리아》는 아르멘다리스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으며, 이 영화는 1946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아르멘다리스가 돌로레스 델 리오와 함께 출연한 다른 주요 작품으로는 《라바도나다스》(1944)와 《부감빌리아》(1944) 등이 있다. 마리아 펠릭스와는 《에나모라다》(1946)와 같은 영화에서 함께 연기했다.[3]

2. 3. 할리우드 진출과 국제적 활동 (1947-1963)

《3인의 대부》(1949)에서 해리 캐리 주니어 및 존 웨인과 함께 있는 아르멘다리스


1940년대 후반, 아르멘다리스는 존 포드 감독의 눈에 띄어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존 포드는 아르멘다리스를 선호하는 배우 중 한 명으로 꼽았고, 자신의 영화 《도망자》(1947), 《요새 아파치》(1948), 《3인의 대부》(1948)에 그를 출연시켰다.[9]

《다이앤》(1956)에서 라나 터너와 함께 있는 아르멘다리스


멕시코에서의 성공적인 경력 외에도 아르멘다리스는 할리우드와 유럽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할리우드에서는 존 휴스턴 감독의 《우리는 스트레인저》(1949)를 비롯하여 《토치》(1950), 《보더 리버》(1954), 《정복자》(1956), 《다이앤》(1956)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에서 촬영한 영화 《루크레스 보르지아》(1953)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시기 멕시코에서도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엘 브루토》(1953), 《라 쿠카라차》(1959), 《라 반디다》(1962) 등 주목할 만한 영화에 출연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일본에서는 에밀리오 페르난데스 감독과 아르멘다리스가 주연을 맡은 《진주》가 처음으로 소개된 멕시코 영화로 알려져 있다.[9]

아르멘다리스의 마지막 출연작은 두 번째 제임스 본드 시리즈 영화인 《007 위기일발》(1963)이다. 이 영화에서 그는 본드의 조력자인 터키 정보부 이스탄불 지국장 알리 케림 베이 역을 맡았다.[9] 하지만 촬영 당시 아르멘다리스는 이미 말기 암 투병 중이었고, 촬영 후반부에는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연기를 지속하기 어려웠다. 그의 마지막 장면 일부는 테렌스 영 감독이 대역으로 촬영을 마무리했다.[4] 결국 아르멘다리스는 영화 개봉 4개월 전인 1963년,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51세의 나이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007 위기일발》은 그의 유작이 되었다.[9]

2. 4. 질병과 죽음

1956년, 아르멘다리스는 하워드 휴즈가 제작한 영화 ''정복자''에 출연했다. 이 영화는 미국 정부가 인근 네바다에서 대기 중 핵실험을 진행하던 시기에 유타주에서 촬영되었다. 25년 이내에 영화 제작에 참여한 220명 중 91명(41%)이 에 걸렸고, 그 중 46명이 암 또는 관련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아르멘다리스는 엉덩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수년 후 목의 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었다.[5] 그는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에 있는 UCLA 메디컬 센터에서 자신의 상태가 말기임을 알게 되었다. 가족의 재정적 안정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며 영화 ''007 위기일발''을 촬영했다고 전해진다. 이 영화는 그의 유작이 되었다.[9]

1963년 6월 18일, 아르멘다리스는 병원에 몰래 반입한 총으로 가슴에 총을 쏴 자살했다.[6] 그는 51세였다.[7] 그는 멕시코 멕시코시티에 있는 판테온 하르딘 묘지에 묻혔다.[8]

3. 사생활

아르멘다리스는 배우 카르멜리타 보어(Carmelita Bohr, 본명: 파르도)와 결혼하여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그의 아들 페드로 아르멘다리스 보어(1940년 4월 6일 ~ 2011년 12월 26일) 역시 배우가 되었으며, 영화 살인 면허(1989년)에 출연했다. 그의 딸인 TV 프로듀서 카르멘 아르멘다리스 보어(1946년, 멕시코시티 출생)는 니카라과 국적의 미셸 피어슨 콰드라와 결혼했다가 이혼했다.

4. 출연 작품

페드로 아르멘다리스는 멕시코 영화 황금기를 이끈 대표적인 배우 중 한 명으로, 할리우드와 유럽 영화계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에밀리오 페르난데스 감독과의 협업을 통해 멕시코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한 작품들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으며, 존 포드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며 할리우드에서도 입지를 다졌다. 그의 주요 출연 작품은 활동 무대에 따라 아래와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자세한 작품 목록과 내용은 각 하위 문서를 참조하라.

4. 1. 멕시코 영화



아르멘다리스는 학업을 마친 후 멕시코로 이주하여 철도 회사에서 일하거나 관광 가이드, 이중 언어 잡지 《멕시코 레알》의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그는 미국인 관광객에게 《햄릿》의 독백을 낭송하는 모습을 본 영화 감독 미겔 사카리아스에게 발탁되어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후 에밀리오 페르난데스 감독을 만나 배우와 감독으로서 수많은 영화에서 협력하게 되었다. 《나는 순수한 멕시코인》(1942), 《플로르 실베스트레》(1942), 그리고 특히 《마리아 칸델라리아》(1943)는 그들의 첫 공동 작품이었다. 에밀리오 페르난데스의 지도를 받으며 페드로 아르멘다리스는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닌 영화적 개성을 발전시켰다. 그는 주로 강인하고 남성적인 인물, 원주민, 농부, 혁명가 역할을 맡았다. 아르멘다리스는 여러 차례 판초 비야를 연기했으며, 돌로레스 델 리오나 마리아 펠릭스와 같은 유명 여배우들과 호흡을 맞췄다.

아르멘다리스는 돌로레스 델 리오와 함께 멕시코 영화 역사상 가장 전설적인 커플 중 하나로 꼽힌다. 《마리아 칸델라리아》는 아르멘다리스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으며, 이 영화는 1946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아르멘다리스가 돌로레스 델 리오와 함께 출연한 다른 주요 작품으로는 《라바도나다스》(1944), 《부감빌리아》(1944), 《라 말케리다》(1949) 등이 있다. 마리아 펠릭스 역시 《에나모라다》(1946)나 《마클로비아》(1948)와 같은 영화에서 그의 상대역으로 출연했다.[3] 멕시코 영화 연구가 가나야 시게로는 아르멘다리스가 "멕시코의 정경을 대표하는 남성을 체현했다"고 평가했다.[9] 일본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멕시코 영화는 페르난데스 감독의 《진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작품의 주연 역시 아르멘다리스였다.[9]

1940년대 후반, 아르멘다리스는 존 포드 감독의 도움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그는 포드가 선호하는 배우 중 한 명이었으며, 포드의 영화 《도망자》(1947), 《요새 아파치》(1948), 《3인의 대부》(1948)에 출연했다. 멕시코 영화 활동 외에도 할리우드와 유럽에서 주목할 만한 경력을 쌓았다. 할리우드에서의 다른 주요 작품으로는 존 휴스턴 감독의 《우리는 스트레인저》(1949), 《토치》(1950), 《보더 리버》(1954), 《정복자》(1956), 《다이앤》(1956) 등이 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에서 촬영된 《루크레스 보르지아》(1953)에 참여했다. 멕시코에서는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엘 브루토》(1953), 《라 쿠카라차》(1959), 《라 반디다》(1962)와 같은 주목할 만한 영화에 출연했다.

아르멘다리스의 마지막 출연작은 두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인 《007 위기일발》(1963)로, 본드의 동료인 케림 베이 역을 맡았다. 그는 이 영화 촬영 중 말기 암 진단을 받았으며, 촬영 후반부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연기를 지속하기 어려웠다. 그의 마지막 장면 일부는 테렌스 영 감독이 대역으로 촬영했다.[4] 아르멘다리스는 《007 위기일발》 개봉 4개월 전인 1963년,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9]

연도제목배역비고
1953루크레즈 보르지아체사레 보르지아일명 루크레티아 보르지아
1955포르튀 카레이그리체프



연도제목배역비고
1935로사리오엔리케
1936이르마 라 말라
마리아 엘레나에두아르도
1937라스 콰트로 밀파스
할리스코 누에바 페르데페드로 곤잘레스
로드의 양귀비후안 파디야
1938미 칸디다토판초 가르시아
라 아델리타사비노 에스트라다
로스 밀로네스 데 차플란안토니오
칸토 아 미 티에라안토니오
1939엘 인디오펠리페
강의 여왕젊은 어부
라 치나 일라리아아폴로니오
우나 루스 엔 미 카미노다니엘
빌라의 베테랑과 함께페드로 몬드라곤 소령
1940로스 올비다도스 데 디오스세논 로하스
가여운 악마라울 솔라레스
엘 차로 네그로라몬
말라 예르바추이 로드리게스
엘 헤페 막시모
1941엘 세크레토 델 사체르도테
엘 조로 데 할리스코레오나르도
피도 모래도 아니다프랭크
1942알라 엔 엘 바히오후안 에르난데스
라 에포페야 델 카미노라울
델 란초 아 라 카피탈페드로 로드리게스
시몬 볼리바르브리세뇨 멘데스 장군
라 이슬라 데 라 파시온 (클리퍼턴)엘 토로
나는 진짜 멕시코인이다과달루페 파디야
1943와일드 플라워호세 루이스 카스트로
정열의 땅포르피리오
과달라하라페드로
레드 콩가페데리코 로블레스
또 다른 새벽옥타비오
1944마리아 칸델라리아로렌조 라파엘
과자 전쟁안토니오 델 바예
엘 코사리오 네그로엘 코사리오 네그로
라스 칼라베라스 델 테러롤란도
알마 데 브론세
1945엔트레 에르마노스
라스 아바돈다다스후안 고메즈아리엘상 최우수 남우상 후보
엘 카피탄 말라카라레오나르도 부엔로스트로 대위
부감빌리아리카르도 로하스
1946라얀도 엘 솔페드로, 성인
에나모라다호세 후안 레예스 장군아리엘상 최우수 남우상 후보
1947라 카사 콜로라다가스파르
알부르 데 아모르
진주퀴노아리엘상 최우수 남우상 수상
1948후안 차라스케아도후안 로블레도 / 후안 차라스케아도
엔 라 아시엔다 데 라 플로르후안 로블레도 - 엘 히호 데 후안 차라스케아도
마클로비아호세 마리아
1949알 카에르 라 타르데세바스티안 델 라노
1949엘 아바도나도다미안 로페스
사랑받지 못한 여자에스테반
엘 차로 이 라 다마페드로 메네세스
1950부에르베 판초 빌라판초 빌라
라 로카 데 라 카사호세 마리아 크루스
포르 라 푸에르타 파르사베르나르도 셀리스
로사우로 카스트로로사우로 카스트로아리엘상 최우수 남우상 후보
1951티에라 바하마넬릭
보다스 데 푸에고로돌포 카레라
카미노 델 인피에르노페드로 우리베
포르 케레르 아 우나 무헤르호세 렌테리아
그녀와 나페드로 무뇨스
1952세 명의 행복한 친구발도메로 미렐레스
라 노체 아반자마르코스 아리스멘디
카르네 데 프레시디오파블로 곤잘레스
엘 레보조 데 소레다드로케 수아조아리엘상 최우수 남우상 수상
1953톨레도의 연인들돈 알바로 블라스 바스토 이 모스케라
엘 브루토페드로
1954레토 아 라 비다디에고 말도나도
물라타마르틴 선장
라 레벨리온 데 로스 콜가도스칸디도 코스타아리엘상 최우수 남우상 후보
두 개의 세계와 하나의 사랑리카르도 아나야
1956라 에스콘디다펠리페 로하노
카나스타 데 쿠엔토스 멕시카노스카를로스 코시오세그먼트 "티그레사, 라"
비바 레볼루시온
1957어린 시절을 갖지 못한 여자알베르토 가르사 시푸엔테스 변호사
로스 살바헤스페드로 마티아스
아시 에라 판초 빌라판초 빌라
1958키에로 세르 아르티스타본인
1959안도 볼란도 바호페드로
카페 콜론세바스티안 로블레스 장군
라스 세뇨리타스 비방코이노센시오 토렌테라 장군
엘 자르코엘 자르코
플로르 데 마요페페 감보아
세드 데 아모르페드로 오르티즈
라 쿠카라차발렌틴 라조 대령
요 페카도르프란시스코 브라카몬테스
우리의 매일의 굶주림마카리오 페르난데스
1960로스 데사라이가도스조 파체코
베라노 비올렌토프란시스코 페냐
두 명의 순종하지 않는 아들페드로
캘리버 44돈 페드로
판초 빌라 이 라 발렌티나판초 빌라
아키 에스타 판초 빌라판초 빌라
엘 임포스토르세사르 루비오 교수
로스 에르마노스 델 이에로장군
라 카르셀 데 카네네아페드로
1961엘 인둘토루카스 산체스 파론도
1962엘 테헤도르 데 밀라그로스세뇨르 쿠라
로스 발리엔테스 노 무에렌페드로
1963라 반디다로베르토 에레라


4. 2. 할리우드 영화



1940년대 후반, 페드로 아르멘다리스는 멕시코 영화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존 포드 감독의 눈에 띄어 할리우드로 진출했다. 존 포드는 아르멘다리스를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영화에 여러 차례 출연시켰다. 아르멘다리스가 출연한 존 포드 감독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도망자》(1947), 《요새 아파치》(1948), 그리고 존 웨인과 함께 출연한 《3인의 대부》(1948) 등이 있다.[9]

멕시코에서의 활동과 병행하며 할리우드와 유럽에서도 꾸준히 경력을 쌓았다. 할리우드에서는 존 포드 작품 외에도 존 휴스턴 감독의 《위 워 스트레인저스》(1949), 《툴사》(1949), 《토치》(1950), 《보더 리버》(1954), 존 웨인과 다시 호흡을 맞춘 《정복자》(1956), 라나 터너와 함께 출연한 《다이앤》(1956) 등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며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그의 마지막 할리우드 출연작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두 번째 영화인 《007 위기일발》(1963)이다. 이 영화에서 그는 제임스 본드의 든든한 조력자인 이스탄불 정보국 지부장 알리 케림 베이 역을 맡아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촬영 당시 아르멘다리스는 이미 암 말기 상태였고,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촬영 후반부에는 감독 테렌스 영이 일부 장면에서 그의 대역을 맡기도 했다.[4] 안타깝게도 아르멘다리스는 영화가 개봉되기 4개월 전인 1963년 6월 18일,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51세였으며, 《007 위기일발》은 그의 유작이 되었다.[9]

=== 주요 할리우드 출연작 ===

연도제목배역비고
1947도망자경찰 중위멕시코에서는 El Fugitivo로 개봉
1948요새 아파치보퍼트 하사
3인의 대부페드로 "피트" 로카 푸에르테
1949툴사짐 레드버드
위 워 스트레인저스아르만도 아리에테
1950토치호세 후안 레예스멕시코에서는 Del odio nace el amor로 개봉
1954보더 리버에두아르도 카예하 장군
1955작은 무법자토레스 장군
1956다이앤프랑수아 1세
정복자자무가
1957빅 부들마스테기 대령
1959리틀 새비지엘 티부론
원더풀 컨츄리치프리아노 카스트로
1961아시시의 프란치스코술탄
1963캡틴 신드바드엘 케림
007 위기일발알리 케림 베이유작


4. 3. 유럽 영화

아르멘다리스는 멕시코와 할리우드에서의 경력 외에도 유럽에서도 주목할 만한 활동을 펼쳤다. 프랑스에서는 《루크레스 보르지아》(1953)에 참여했으며, 이탈리아와 영국 등지에서도 여러 영화에 출연했다.

그의 마지막 출연작은 영국에서 제작된 두 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인 《007 위기일발》(1963)이다. 이 영화에서 그는 본드의 조력자인 알리 케림 베이 역을 맡았다. 당시 아르멘다리스는 암 말기 상태였으며, 촬영 후반에는 건강 악화로 인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웠다. 일부 장면은 그의 대역이었던 테렌스 영 감독이 대신 촬영하기도 했다.[4] 아르멘다리스는 이 영화의 개봉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9]

아르멘다리스의 주요 유럽 영화 출연작은 다음과 같다.

연도제목배역비고
1953루크레스 보르지아체사레 보르자프랑스-이탈리아 합작
1955마윰바의 톰톰마르티네즈이탈리아 영화
1957늑대와 인간조반니이탈리아-프랑스 합작, 별칭 늑대들
1957마누엘라마리오 콘스탄자영국 영화
1962거인들이 온다카드모이탈리아-프랑스 합작, 별칭 내 아들, 영웅 (미국)
1963007 위기일발알리 케림 베이영국 영화, 유작[9]


참조

[1] 웹사이트 Pedro Armendáriz {{!}} Rotten Tomatoes https://www.rottento[...] 2024-10-30
[2] 서적 Pedro Armendáriz: México en el alma Clío 1997
[3] 웹사이트 Pedro Armendáriz Biography http://www.biografia[...]
[4] 웹사이트 BondMovies.com http://www.bondmovie[...]
[5] 뉴스 Los últimos minutos de Pedro Armendáriz, el hombre que se mató de un disparo en la cama del hospital https://www.univisio[...] Univision Communications Inc. 2019-03-05
[6] 뉴스 Pedro Armendáriz y la trágica historia detrás de su suicidio https://www.eluniver[...] 2019-03-05
[7] 서적 Susan Hayward: Her Films and Life https://books.google[...] McFarland Publishing 2015-07-11
[8] 뉴스 A 50 años de la muerte de Pedro Armendariz http://eltiempolatin[...] 2019-03-05
[9] 간행물 メキシコの美の巨星た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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